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머무는 동안,
아르헨티나인들의 시위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과연 이들의 시위문화는 어떨까?'하는 호기심에
멀리서 엿보기라도 하고 싶지만,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 듯이
문제는 역시나 안전...
만에 하나 안 좋은 불상사라도 생기는 날에는
전체 여행 자체를 망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아니, 그런 상황에선 여행이 문제가 아니지...ㅋ
남미는 아직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나라도 많고,
무장 강도들이 나타나 여행자들을 납치하거나
총칼을 들이대고 돈을 내 놓으라고
위협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비록 아르헨티나가 다른 남미 국가들에 비해서
치안이 상당히 안정된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미의 일부인 것을...
아무리 안정된 땅에서 벗어나
모험이 넘치는 삶을 경험하기 위해
남미의 구석 구석을 누비고 있기는 하지만,
평소에도 위험하다는 남미 땅에서
그들의 시위문화까지 경험하겠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 봐도 너무나 무모해 보인다.
해서 일단 나가서 상황을 좀 살펴본 뒤,
'아니다' 싶으면 곧 바로 되돌아 오기로 하고
조심스레 5월 광장쪽으로 다가가 본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필자의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시위 현장 주변에는 수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평화롭게 시내를 행진하고 있는 시위대를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심지어는 시위대와 관광객이 한데 뒤섞여
누가 시위대이고 누가 관광객인지 조차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시위현장이라면 의레
쇠파이프와 각목이
머리 위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며,
돌멩이와 화염병이
하늘 위에서 공중 곡예를 펼치고,
최루가스와 물대포가
누가 누가 멀리 날아가나
경주를 벌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쫓는자와 쫓기는 자가 숨바꼭질을 해가며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살벌한 분위기의 시위문화를 상상했던 건
어쩌면 80년대 한국의 시위현장을 경험했던
필자의 선입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위 현장 한쪽에서는
대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북을 치고 음악을 연주하며
그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이쯤되면 시위 현장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문화 축제 현장에 가깝지 않나 싶다.
영락 없는 대학 동아리 축제 현장에 와 있는 듯...
▲ 헉!!!
여기가 정말 시위 현장이 맞긴 맞는건가?
또 다른 곳에서는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이
숯불에 소세지를 굽느라 분주하다.
이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무엇을 위해 시위를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곳곳에 붙어 있는 MST라는 문구로 보건데...
MST는...
무토지 농업 노동자 운동...
즉, 땅 없는 농민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또는 세상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
가진자들은 더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고
가난한 농민 노동자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 지는 세상...
땅이 없는 농민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세상이다.
▲ 이 어린 꼬마는 과연 무엇을 외치며
무엇을 위해 거리로 나섰을까?
이들의 시위는 이렇게 밤 늦도록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곳엔 쇠파이프나 각목도,
돌멩이나 화염병도, 최루가스나 물대포도 없었다.
심지어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경찰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직 시위대가 빚어 내는 풍악소리와
노점상들이 만들어 내는 고기 굽는 냄새와 연기만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하늘을 뿌옇게 뒤덮고 있다.
비록 지금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과거 한때는 세계 5대 경제대국들 중 하나였을 정도로
세계로부터 선진국 대접을 받아 왔던 그들이다.
현재 그들의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든지 간에
필자의 눈에 비친 그들의 시위문화 만큼은
분명 선진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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