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늘었다.
어제 저녁 산장에 도착해서 저녁을 지어 먹고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 보는 순간,
나의 작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탄성이 절로 튀어 나온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팔을 뻗어 올려 휘저으면,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은
밤 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은하수.
어릴적 시골에서 자라서
아름다운 밤 하늘을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이런 장관을 마주한 건 내 생애 몇 번 되지 않는다.
볼리비아 여행 중
해발 3675m의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만났던 밤 하늘,
그 곳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장관이다.
그 순간,
무언가 머릿 속을 강타하고 지나간다.
그래!!
바로 그거다!!
야생~~ 생 야생의 잠자리~~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건
그야말로 사치고 낭비다.
또 천조각 같은 텐트에 의지해 잠을 청하는 것도
이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모독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자연 속,
내가 머물고자 하는 곳에 들어가 자리를 깐다면
그 곳이 곧 나의 집이고,
하늘이 이부자리요,
사방이 내 정원인 것을.
다행히 날씨는 그리 춥지 않다.
바람이 좀 세차게 불고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장소만 잘 고르면 되는 일이다.
자리를 물색하던 중
바람막이가 될만한 언덕을 찾았다.
그 아래서 침낭 속에 몸을 구겨넣고
투명한 판초로 얼굴 부분을 덮고
하늘을 향해 누웠다.
초롱초롱 빛나는 저 별들...
아름답다.
그리고 행복하다.
이 순간 만큼은 아무것도 부러울게 없다.
단지 무겁고 위험하다고
DSLR 카메라를 챙겨 오지 않았던 게
못내 아쉬울 뿐이다.
도시의 불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산 중의 산 속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내려 앉았다.
단지 나무들이
서로를 부비는 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호화스럽고
아름다운 침실에 누워 꿈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렇게 한 숨을 자고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다.
10시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3시간을 잔 모양이다.
그런데 뭔가 순간적으로 느낌이 이상하다.
왠지 모르게 불길하다.
우선은 그리도 세차게 불어대던
바람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초롱초롱 빛나던 수 많은 별들은
다 어디로 간거야?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 속에 누워 있는 듯하다.
얼굴을 덮고 있던 판초를 걷어 젖혔다.
헐~~ 세상에나...
그 사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냐구...
겨우 세 시간 만이다.
아무리 이 곳 날씨가
변덕스럽기로 악명이 높다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겨우 세 시간만에
180도 다른 상황으로 변해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일단 비부터 피하고 볼 일이다.
하지만 새벽 1시에
산장에 들어 갈수도 없는 상황이고,
텐트를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취사장에 가보니 문이 굳게 잠겨 있다.
결국 샤워장으로 향했다.
샤워장엔 메인 스위치를 내려 버렸는지
전기가 들어 오지 않는다.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다.
할 일도 없으니 시간을 때우기 위해
후레쉬를 켜 두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곤 암흑 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남들은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이 시간에
이게 무슨 쌩 난리람?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약간은 맛이 좀 간 사람 마냥
혼자 실실 웃어 가면서...
그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뭔가 내 발을 건드리는 느낌이 든다.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뭘까...?
혹시 뱀은 아닐까?
후레쉬를 켜 보았다.
순간 빵~ 터지고야 말았다.
세상에 이건 또 뭔 일이야?
글쎄 새앙쥐 한마리가
내 운동화를 물어 뜯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녀석 후레쉬 불빛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목표를 위해 고군분투중이다.
가이드북에 의하면
이 곳 국립공원의 야생 동물들은
사람 조차도 신경쓰지 않는다더니
새앙쥐 조차도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야, 임마!!!
이 곳 트레킹을 위해
여기 올때 새로 산 신발이란 말이야!!!
발로 한번 툭 차니
그 때서야 샤워장 하수구로 잽싸게 몸을 숨긴다.
그리곤 후레쉬만 껏다하면
아직도 내 신발에 미련을 못 버렸는지
어느새 다시 다가온다.
날이 새기까지 긴 시간을
그렇게 새앙쥐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톰과 제리' 한 편은 찍은 듯하다.
여행이란게
아무리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나
얻게 되는 체험이 묘미라지만,
밤새도록 잠도 제대로 못자고
새앙쥐와 신경전을 벌여야 했던
또레스 델 파이네에서의 첫날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 시간들도 먼 훗날엔
아득하게 그리운 추억이 되겠지.
날이 밝기도 전에 일찌감치 아침을 챙겨먹고
날이 개이기만을 기다렸다.
오늘은 일정상 24km 이상을 걸어야 하는데다,
이번 트레킹 코스 중 가장 고난도의 길이라는
프란세스 계곡을 따라 올라야 한다.
당초 예정은
날이 밝자마자 새벽같이 출발하려 했으나,
날씨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한 시간쯤 기다리다
빗줄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출발을 서두른다.
▲ 산 위에 쌓여 있는 빙하들이
운무와 어우러져 더욱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낸다.
빗줄기는 걷는 내내
가늘어졌다 굵어졌다를 반복한다.
등에 배낭을 메고
그 위에 판초를 뒤집어 쓰고 걷다보니,
통풍이 안되서
여간 덥고 불편한게 아니다.
▲ 비로 인해 불어난 계곡물이
힘차게 흘러 내리고 있다.
▲ 오전 11시의 한 낮인데도
빽빽하게 나무들로 우거진 숲 속은
마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시간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쯤되니
이제는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등 뒤에서 꼭 뭔가 따라 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서움을 잊기 위해 혼자 소리도 질러보고
뒤도 돌아보면서 걷는다.
누군가 이 모습을 봤더라면
정신적으로 살짝 맛이 간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 아무에게도 잡혀가지 않고
어두운 숲 속은 무사히 통과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길은 점점 험해진다.
▲ 너무나 허름해 보이는 다리
아무리 떨어져서는 죽고 못사는 연인사이더라도
잠시 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다리다.
다리 입구에는
'동시에 두 사람이 건너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다.
▲ 이제껏 걸었던 평탄한 길과는
여기서 작별을 고한다.
이제부터는 3박 4일 동안의 일정 중
가장 난코스라는 프란세스 계곡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 역시나 소문대로
초반부터 가파른 자갈길이 이어진다.
▲ 어디에도 길처럼 보이는 곳은 없다.
군데 군데 서 있는 말뚝과
바위 위에 칠해진 페인트 자국에 의지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아니, 이게
일반인들을 위한 트레킹 코스가 맞는거냐고?
칠레는 일반인들 대부분이
전문 산악인이라도 되는거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불평은 토해 내면서
오르고 또 오른다.
▲ 왼쪽으로는
산을 뒤덮고 있는 빙하가 눈길을 끈다.
산 위에 쌓여 있는 빙하...
이제껏 호수 위에서 보아 왔던 빙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 지금까지 만났던 호수 위의 빙하가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맑고 깨끗한 모습인데 반해,
이 곳의 빙하는 한 눈에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미를 잔뜩 품고 있다.
▲ 여기 저기 빙하 녹은 물과 빗물이 어우러져
폭포를 이루고 있다.
▲ 뾰쪽뾰쪽 날이 선 돌멩이들이
여기 저기 널부려져 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일 나겠다 싶다.
뒤를 돌아보니
올라왔던 길들이 아찔해 보인다.
어제는 하루종일 세찬 맞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걷느라 고생 고생했는데,
오늘은 그 악명 높은
파타고니아의 바람이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비로 인해 길이 미끄럽고
군데 군데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어
발이라도 잘 못 디디면
흙탕물을 뒤집어 쓰기 일쑤다.
다음 편에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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