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은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그 전날 밤 한바탕 요란한 행사(?)를 치르느라
제대로 잠을 못 잔 탓도 있겠지만,
하루종일 걷느라 피곤했던 모양이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시계 바늘은 이미 6시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
산장 밖에서는 밤새 야영을 했던 여행자들이
벌써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그들을 보니 왠지 부러움이 앞선다.
산장은 멀리서 자연을 관조하는 것이고,
캠핑은 자연 속에 파묻혀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이라 했다.
무엇을 선택할 지는 떠나는 자의 몫이지만,
기왕 불편을 무릅쓰고
자연을 느끼려 여기까지 왔다면
캠핑을 했어야 옳았을 터인데...
대단한 캠핑 예찬론자인
김산환님의 '캠핑폐인' 중 한 대목이 떠오른다.
남자는 캠핑장에 도착한 순간 깨어난다.
자신의 DNA에 숨겨져 있던
야생의 본능이 살아난다.
이 사회가 자신에게 씌운 굴레를
과감히 벗어 던지려고 든다.
남자가 휘두르는 망치는
그를 구속하고 주눅들게 하는
이 시대를 향한 것이다.
자신을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게 만든
잔인한 사회를 향한 시원한 돌팔매질이다.
▲ 어제 하루종일 내리던 비는 밤새 그치고
우중충한 구름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에메랄드빛 호수 위의 작은 물결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 반대편으로는 바람이 깎아 놓은 듯 한
거대한 조각작품 같은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다.
압도하는 웅장함으로
보는 이들을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곳이다.
트레킹 첫째날은
세찬 바람과 싸우며 걸어야 했고,
어제는 하루종일 쏟아지는 비 속을 걷느라
고단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바람도 잔잔하고 날씨도 맑아서
걷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다.
게다가 밤새 산장에서 푹 잘 자서 그런지
발걸음도 가볍고 상쾌하다.
▲ 첩첩히 버티고 선
안데스의 깊은 계곡을 만났다.
이제부터는 이 계곡을 따라 걷는다.
▲ 계곡 밑을 내려다보니
눈 앞이 아찔할 정도다.
어제처럼 먼산 보며 걷다가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는 날에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판이다.
▲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곳곳에서 트레커들을 만나볼 수 있다.
큰 배낭을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고 있는 트레커가
무척이나 힘겨워 보인다.
▲ 칠레노 산장 앞에서 만난 일본인 여행자들
참 재미있는 친구들이다.
기념사진 찍는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저절로 웃음이 킥킥 터져 나온다.
뒤쪽으로 보이는 칠레노 산장은
비수기로 접어 들면서 이미 문을 닫은 상태다.
대부분의 산장들이
여름철인 11월에서 3월 사이에 개방을 하고
기온이 떨어지는 4월이 되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한다.
이 곳도 여름철 성수기 한 철 장사로
먹고 사나보다ㅎ
여름철 성수기가 지나 버린
4월에야 이 곳을 찾은 나로서는
트레킹을 시도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트레킹을 이미 마치고 돌아온 여행자들로부터
산 속에는 이미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상당히 춥고
바람도 세차게 불며 비도 자주 내린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장도
이미 문을 닫은 곳이 많다는 전언이었다.
트레킹을 원치 않는 여행자들은
보통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1일 투어를 이용한다.
일일투어는 자동차를 이용해서
국립공원 외곽지역을 돌면서
멀리서나마 국립공원 내의 자연을
느껴볼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산 속을 걷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번 트레킹이야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첫째날과 둘째날은
날씨 때문에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여름철 성수기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바로 온 산을 알록달록 물들인 단풍의 물결이다.
▲ 숲 속에 들어서니
한적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하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바람도 태풍처럼 느껴지고
주변으로 흐르고 있는 계곡물 소리도
마치 거대한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처럼 들린다.
평소라면 분명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들리지 않았을 소리들인데...
너무나 적나라하고 과장되게 들려온다.
▲ 꼬불 꼬불한 산 길을 따라 걷다보니
새하얀 만년설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정상을 감싸고 있는 하얀 구름들과
알록 달록한 단풍들까지 함께 어우러져,
신비스러운 풍경을 연출해 낸다.
▲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살 아래
눈은 쉴새없이 녹아 내리고 있다.
계곡 마다 쏟아지는 작은 폭포들이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 숲 길은 언제 걸어도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짙은 숲 속의 향기가
이방인의 온 몸을 휘감는다.
숲 향기는 아무런 대가없이
오직 떠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 숲 속으로 이어지던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
엽서의 그림 같은 풍경이 숨어 있다.
혹자는 묻는다.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맞는 말이긴 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 듯이
떠나면 힘들고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런 고생과 불편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떠나는 것은
길 끝에 지금까지의 고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런 고생을 감내하고서 쉼없이 걷는 자만이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래서 좀 불편하고 힘들어도
판에 박힌 일상을 벗어나 기꺼이 떠나는 것이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
이것이 바로 트레킹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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