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은 중독성이 강하다.
눈꽃이나 상고대로 가득한 겨울산을
한 번이라도 올라본 사람이라면
그 감동을 잊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들으며
하얀 눈길 위를 걷는 발걸음 또한
빠져 나오기 힘든 매력이 있다.
설악의 품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새벽 몸을 일으켜
대피소 마당으로 나간다.
하늘엔 짙은 먹구름으로 가득하고
산 위엔 눈발이 날리고 있다.
대청봉 정상 부근에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오르고 있는
산객들의 랜턴 불빛이 보인다.
대피소 복도에 설치된
기상실황 전광판.
새벽 5시 현재 기온은 영하 10도,
풍속은 6m/s를 나타내고 있다.
체감온도 환산표를 보니
현재 체감온도가 영하 22도라고...
후덜덜덜~ㅋ
현재 날씨와 일기예보로 보건대
오늘 일출은 어차피 물 건너 간 듯 싶으니
일찌감치 하산을 서두른다.
또 만나자~ 대청봉~~
굿바이~ 중청대피소~^^
백담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눈이 다져져서 평지가 되어버린
데크계단에 올라서니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친다.
졸다가 선생님한테 회초리로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정신 바짝 차리고
긴장해서 걸으라고 호통치는 듯하다.
완전히 걷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상고대가
눈을 즐겁게 한다.
소청봉 갈림길.
이 곳에서 잠시 결정장애에 빠진다.
마음은 백담사 코스로 향해 있지만
백담 마을버스가 도로결빙으로 인해
운행을 못한다는 것.
백담계곡 6.5km를 걷게 되면
오늘 거의 20km를 걸어야 하는데...
이 추위와 바람 속에서 눈 길을?
게다가 서울 가는 교통편도 신경쓰이고...
썩 내키지가 않는다.
결국 백담사 코스는 다음 산행으로 기약하고
오늘은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기로...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내설악의 비경들이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럴수가...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늘엔 먹구름으로 가득하고
눈발이 날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에 해가 떠오르고 있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대청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 하산할껄...
아쉬움이 남는다.
고산에서 일기예보는 무용지물.
구름이 낄지,
비가 올지,
폭설이 쏟아질지,
화창한 하늘을 보여줄지,
감히 인간이 예측하기 힘든 곳이 고산이다.
해가 뜨니 시야가 탁 트여
눈이 시원스럽다.
이래서 산은 겨울산이다.
비록 오르기는 힘들어도
고생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소청봉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는
줄곧 가파른 내리막 길이다.
마치 땅 속이라도 뚫고 들어갈 기세로
내리꽂는 급경사의 내리막이다.
반대방향으로 오르는 산객들에게는
악명높은 구간이다.
특히나 겨울철 푹푹 빠지는 눈길이라면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부어야 하는
마의구간이다.
간간히 마주치는 산객들이
존경스러워질 정도다ㅋ
하지만 산은 공평하다.
비록 힘은 들어도
이 구간에서 조망되는
외설악 일대의 풍광만큼은 일품이다.
희운각 대피소에 들어선다.
희운각 대피소는
증축공사로 인한 휴업상태로
마당에는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쓸쓸해 보이기 짝이 없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에너지를 보충한다.
설악산 최고의 비경이라 할 수 있는
공룡능선이 시작되는
무너미고개를 지난다.
험준한 공룡능선은 결빙으로 인해
진입이 통제되고 있다.
무너미고개에서 천불동계곡으로 이어지는
이 구간도 역시 가파른 내리막이다.
자칫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다.
이 곳에서 미끄러지면
설악동까지 곧바로 하산인가?ㅋㅋ
여름 장마철이면 우렁차게 쏟아지던
천당폭포는 꽁꽁 얼어붙어서
빙벽을 이루었다.
양폭대피소에 들어선다.
에너지와 수분을 보충하고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길을 나선다.
대피소 마당과 처마 위에 쌓여 있는
눈의 두께가 시선을 끈다.
도대체 눈이 얼마나 내린거야?ㅋㅋ
녹기 전에 쌓이고 또 쌓인 눈이
마치 층층이 쌓인 퇴적암을 보는 듯하다.
설악산 이름에 괜히 '눈 설'자가
들어 있는게 아니겠지.
어제 걸었던 내설악에 비해
외설악쪽에 훨씬 많은 눈이 쌓인 듯하다.
바다가 가까워서 적설량이 많은건가?
바위 위에 쌓인 눈이
멋진 설경을 만들어 낸다.
이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비경에
산객들의 발걸음은 자꾸만 지체된다.
눈이 녹아내리다 그대로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었다.
절벽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이
또 하나의 겨울풍경을 만든다.
비선대를 통과한다.
비선대에서 설악동탐방지원센터까지는
산책로 같이 평탄하고
아늑한 숲길이 이어진다.
신흥사 불상 앞을 통과하며
1박 2일간 걸었던
설악산 겨울산행을 마무리한다.
이 힘들고 위험한 겨울산에
왜 오르냐고 묻는다면
일단 한번 겨울산에 올라보라고
답해주고 싶다.
혹독하고 매섭지만
매혹적이고 짜릿한 맛에 빠져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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