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주 2일차(18.8km)
세석 대피소 -> 장터목 대피소 -> 천왕봉
-> 중봉 -> 치밭목 대피소 -> 유평 -> 대원사 주차장
넉넉하게 품어준
지리산의 아늑한 품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종주 2일차 일정을 시작한다.
오늘은
지리산의 제1봉 천왕봉과
제2봉 중봉을 넘어
대원사로 하산하는 일정이다.
새벽 4시 30분
세석 대피소를 떠나
장터목 대피소로 향한다.
애초 계획은 3시경에 출발해서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자 했으나,
2시쯤 일어나 밖에 나와 보니
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고
짙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날씨를 핑계로 뭉그적거리다
결국 4시 30분이 되서야 출발한다.
헤드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땅만 보고 걷기를 한 시간 가량...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혹시나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발걸음은 자꾸만 빨라진다.
뜻밖의 불청객을 만났던
세석 대피소에서의 어젯밤
저마다의 코가 빚어내는 즉흥연주에
뒤척이는 밤을 보내야만 했다.
아마도 어제 내가 덜 피곤했었나 보다ㅋ
아무것도 못 들을 정도로
곯아 떨어졌어야 했는데...ㅋㅋ
지리산의 주능선 길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연하선경...
날이 밝은 후에야 이 길을 걷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른 새벽이라
온통 무채색의 세상이다.
해발 1721미터의 연하봉을 넘고...
산 능선과 구름 사이
좁은 틈새로 보이는 하늘에
여명의 붉은 기운이 짙어져 간다.
어쩌면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드디어 장터목 대피소에 당도한다.
이 곳이 예전엔 산청과 함양 사람들이
만나서 열리는 장터였다는데...
이 높은 곳에 어떻게 장이 섰을지...
지금은 천왕봉 일출을 보려는 산객들로
가장 북적대는 대피소가 되었다.
장터목 대피소 앞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첩첩한 산그리메 또한
더없이 아름답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왕봉을 향해서 또 다시 진격...
하지만 장터목 대피소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의 초입은
급경사의 돌계단...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오르고 또 오른다.
제석봉 고사목 군락지대에 오른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울창한 숲이었다는 이 곳.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질러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자연파괴의
부끄러운 자취로 남아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 보니...
장쾌한 능선의 산그리메가
시원스런 조망으로
그간의 노고를 보상해 주는 듯하다.
이틀 동안 지나왔던 산 봉우리와 능선들이
발 아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역시나 변화무쌍한 고산의 날씨...
순식간에 세찬 바람과 함께
짙은 구름들이 몰려와
주변을 삼키어 버린다.
주변 봉우리들이 흘러가는 구름에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 듯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하늘로 올라가는 문'이라는
통천문을 만난다.
통천문의 바위구멍을 통과해서
가파른 데크계단과 돌계단을 오른다.
허벅지가 팍팍해지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 쯤
지리산의 정상인 천왕봉에 올라선다.
장터목 대피소를 떠난지
거의 한 시간만이다.
정상은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우뚝 솟아 있지만,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짙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겠다는
기대는 물 건너 가고...
3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데...
나로서는 아직
쌓은 덕이 부족한가 보다^^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다.
중봉을 넘어 치밭목 대피소를 지나
대원사 주차장까지...
13.7km를 걸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하산길이다.
하산길도 만만치가 않다.
하산길이라고 해서
내리막 길만 있을거라는 생각은
경기도 오산...
하산길도 끊임없이 봉우리를 넘어야 하는
고행길이다.
지리산 제2의 봉우리 중봉에 올라선다.
사실 중봉은 해발 1874미터로서
1708미터의 설악산 대청봉 보다 높다.
단지 천왕봉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떠오른다ㅋ
저 멀리 능선 위에
이번 종주길의 마지막 대피소인
치밭목 대피소가 보인다.
해발 1685미터의 써리봉을 지나...
이번 종주길의 마지막 대피소인
치밭목 대피소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햇반을 구입해
이른 점심을 먹고
식수를 보충한 후,
다시 하산길을 이어간다.
이제부터는 한적한 내리막이다.
치밭목 대피소에서
유평마을까지 하산하는 동안
단 한 명의 산객만 만났을 뿐이다.
새재와 유평마을의 갈림길 삼거리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쉬어간다.
하산길이지만...
내리막길이지만...
길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끝까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13시 35분
지리산 종주길의 반대편 끝지점,
유평마을을 통과한다.
하지만 서울행 고속버스가 있는
원지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유평마을에서 대원사 주차장까지
3.5km를 더 걸어 내려가야 하는 상황.
물론 유평마을에서 택시를 불러
원지까지 갈수도 있지만,
대원사 계곡의 장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 옆으로 난 탐방로를 따라
걷기로 한다.
산을 좋아하는 산꾼들의 로망인
지리산 종주...
어리석은 사람이
이 산에 들어오면 지혜로와진다는
지리산 종주를 마쳤으니...
어제와 다른 내가 되어 있기를 바라며
1박 2일 동안 걸었던
42km의 지리산 성대종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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