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딱 한 번 뿐인 여름 휴가를 맞아
어렵사리 떠난 한라산 산행에서
비를 만나게 될 줄이야ㅠ.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많고 많은 날 중에서
하필이면 바로 그 날이라니...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고
구라청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말 값진 경험이고 소중한 추억이다.
여름철에는 시원한 비를 맞으며
일부러 우중산행을 즐기는 산객들도 있는데...
언제 또 비 속에서 한라산에 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날씨가 좋았더라면
뙤약볕 아래 무더위 속에서 오르느라
고생 고생했을 수도 있겠다.
어찌보면 궂은 날씨가
고맙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산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의 선물로 너그러이 받아들이자.
세상만사가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
언제나 진리다.
새벽 5시가 조금 지난 시각.
택시를 타고 관음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오늘은 관음사 코스로 올라
성판악 코스를 통해 하산할 예정이다.
숲 속으로 들어서자,
눈에 보이는 곳은 온통 조릿대가 뒤덮고 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야생초나 야생화는 보이질 않고
잎이 말라 죽은 조릿대만 보일 뿐이다.
시원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감미로운 새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걷는 발걸음이다.
탐라계곡 목교를 만난다.
어디서 얼핏 보니까
한라산 탐라계곡이 지리산의 칠선계곡,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함께
대한민국 3대 계곡이라는데...
글쎄...
분류 주체나 출처는 알 수 없다ㅎ
목교 건너편에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듯한
데크계단이 보인다.
엄청난 경사도로 위압적으로 서 있는
데크계단이 앞을 막아선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계단이야 뭐 두 다리로 걸어 올라가니
조금은 낫다지만,
옆쪽에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국공 직원들은 오금이 저릴 듯ㅋㅋ
올라왔던 길을 돌아본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수준이다.
오르는 길 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위험하고 힘들 듯...
탐라계곡 화장실 앞에서 잠시 쉬어간다.
관음사 코스에는 두 군데 화장실이 있다.
이 곳 탐라계곡 화장실과
삼각봉 대피소 화장실.
오른쪽 저 까마귀는
사람이 올라왔는데도 안 날라가서
간이 심하게 부은 까마귀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조각품이더라는...ㅋㅋ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해도 지나가는 소나기려니 하며
우비도 꺼내지 않고 비를 맞으며 걷는다.
하지만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해발 1200m 지점에 다다르자,
날씨가 본색을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세차게 쏟아붓기 시작한다.
혹시나 호우로 인해
정상으로 올라가는 탐방로가
통제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세찬 비바람을 헤치며 오르고 또 오른다.
그리고 눈 앞에 나타난 삼각봉 대피소.
그 뒤쪽으로 삼각봉이 구름 속에 휩쌓여 있다.
구름이 순식간에 삼각봉을 집어 삼켰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아주 잠깐 하늘이 밝아질 때 보여주는
짙은 초록의 삼각봉 주변 풍광은
그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다.
대피소에서 에너지를 보충하고...
혹시라도 호우로 인해 통제될까봐
서둘러 통제 게이트를 통과한다ㅋㅋ
왕관을 닮았다 해서 이름 지어진 왕관릉이
우뚝솟아 위용을 자랑한다.
지금은 까마득하게 높아 보이지만
백록담을 만나기 위해서는
왕관릉 보다도 고도를 300m는 더 올려야 한다.
용진각 현수교를 건너...
탐방 안내도 상에서
백록담으로 향하는
마지막 빨간색 구간이 시작된다.
또 다시 시작된 가파른 데크계단.
끝없는 계단행렬이 이어진다.
해발 1800m 지점을 통과한다.
이제 고도를 150m만 더 올리면 정상인데
올라갈수록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구상나무 군락지를 걷는다.
운무에 휩쌓인 고사목들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선다.
하지만 정상은 짙은 운무 속에 갇혀
아주 찐한 곰탕맛이다.
마치 24시간 푹 고아낸 사골국물 같은
뾰얀 풍경이다.
게다가 비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몰아치는지
사람이 제대로 서 있기 조차 힘들 지경이다.
땀이 식어 체온이 떨어지니
가지고 있던 옷을 모두 꺼내 입는다.
비바람을 피할 곳이 없으니
빗물 젖은 김밥으로 허기를 달랜다.
바로 저 아래 백록담이 있는데...
백록담은 얄밉게도 짙은 운무 뒤에 숨어서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늘은 백록담과의 상봉이
어려운 운수인가보다.
찐한 곰탕 한 사발 쭈욱 들이키고는
성판악 코스를 통해 하산을 시작한다.
성판악 코스 정상부는
바람을 막아줄 숲이 없으니
세찬 바람 때문에
오르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이나
몸을 가누기가 여간 쉽지 않다.
오락가락하는 비 속에서
진달래밭 대피소에 들어선다.
대피소 안은 비를 피해 숨어든 산객들로
시장통이 따로없다.
사라오름으로 가는 삼거리를 만난다.
백록담을 못 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보기 위해
사라오름으로 향한다.
꿩 대신 닭?
사라오름 분화구에는
데크길까지 물이 차올라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해낸다.
신발을 벗고 첨벙첨벙 물 위를 걸으며
산객들이 마냥 즐거워한다.
얼굴에 화사하게 분칠하고 꽃단장한
어여쁜 새색시 마냥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자태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화려할수록 독이 강하다는...^^
마치 결승선을 통과하 듯
성판악 탐방지원센터를 지난다.
한라산을 여러번 올랐지만
빗속에 걸어서인지 성취감이 더 크다.
그래~ 이 맛이다!!
이 맛에 우중산행을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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